툴루즈 우승 후 10년 궤적 담은 노래
오페라·가곡·영화음악을 한 무대에
▲ 베이스바리톤 길병민은 서울신문 주최 ‘2026 가을밤콘서트’에서 오페라 아리아와 가곡, 영화 음악을 선사한다. 더로드뮤직 제공
“연주가 시작되면 그 자리에는 연주자와 청자만 존재할 뿐이에요. 늘 쌓아 온 본능과 감각을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 전파하는 거죠.” 국제 성악 콩쿠르와 방송, 오페라와 뮤지컬을 오가며 10년을 달려온 베이스바리톤 길병민(32)은 무대에 오르는 순간 객석을 가려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익숙한 관객 앞이든 자신을 평가하는 심사위원 앞이든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무대를 떠받치는 잣대도 분명하다. “대중적인 인기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세상이지만 늘 제 기준이 되는 건 우승자다운 퀄리티죠.”
그 잣대가 향하는 다음 무대는 10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이다. 서울신문이 주최하는 ‘2026 가을밤콘서트’에서 그는 소프라노 황수미, 차웅이 지휘하는 군포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춘다. 최근 서면으로 만난 그는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대극장을 울리는 육성과 만나는 순간을 이번 공연의 관전 포인트로 꼽으며 “클래식 음악에서 성악 장르가 이런 매력이 있구나 하는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에는 그가 걸어온 지난 10년이 겹쳐 있다. 조르주 비제(1838~1875)의 ‘카르멘’ 중 ‘투우사의 노래’, 조아키노 로시니(1792~1868) ‘세비야의 이발사’ 중 ‘소문은 산들바람처럼’, 체사레 안드레아 빅시오(1896~1978)가 작곡한 영화 음악 ‘사랑한다 말해주오, 마리우’(Parlami d’amore, Mariù) 등 오페라 아리아, 영화음악 등을 담았다. 2022년 워너클래식에서 낸 음반 ‘고전의 길’에 수록된 곡들이다.
한국 가곡 ‘마중’은 2020년 음반 ‘꽃 때’에 넣었던 곡으로 여러 성악가가 불렀지만 그의 영상이 유독 많이 재생된다. 프랑스 툴루즈 국제성악콩쿠르 최연소 베이스 우승 이후 이탈리아 피렌체 오페라극장과 영국 로열 오페라 하우스를 거친 정통 성악가의 시간, JTBC ‘팬텀싱어3’(2020) 이후 대중 곁으로 걸어 나온 시간이 한 무대에 나란히 놓이는 셈이다.
그는 “오페라 레퍼토리에서는 다채로운 발성과 이국적인 언어, 연기의 맛”을 볼 수 있다면 “성악가 길병민을 접하게 한 통로가 됐다”는 ‘마중’에서는 절절한 감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대 선배인 황수미를 두고 “학생 시절부터 많은 동료와 함께 동경했던 존재”라고 한 그는 이번 듀엣 무대가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표현했다.
“무대의 기준은 우승자다운 퀄리티”
10월 ‘가을밤콘서트’ 황수미와 듀엣
▲ 베이스바리톤 길병민은 2020년 낸 음반 ‘꽃 때’에 수록된 ‘마중’을 “애착이 많이 가는 곡”이라면서 “소중한 곡을 세상에 낳아준 윤학준 작곡가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더로드뮤직 제공
‘팬텀싱어’ 이후 크로스오버 그룹 ‘레떼아모르’로 활동하고 다양한 무대에 서면서도 그는 콩쿠르를 놓지 않았다. 2023년 미국 오페라 인덱스, 2024년 포르투갈 카스카이스 콩쿠르에서 연이어 1위에 올랐다. 지나온 길에 대해 “오랜 세월 꼴찌도 해 봤고 오랜 시간 1등도 해 봤다”면서 “하나의 길을 열기 위해 10번씩 100번씩 남들이 보지 않는 시간 속에서 더 두드렸을 뿐”이라고 떠올렸다.
콩쿠르 출전은 그에게 일종의 자기점검이다. 그는 “언제든 우승할 수 있는 모드로 몸 상태를 정비해 놔야 마음가짐이 당당해진다”면서 “최상의 컨디션에서 좋은 품질의 무대를 제공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응원하는 이가 늘수록 스스로의 품질을 향한 고뇌가 깊어진다고도 털어놨다. 낯선 나라의 청중에게서 자신의 공연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후기를 접했을 때의 보람과 짜릿함도 그가 국제 무대에 도전하는 이유가 된다.
자신을 향한 엄격한 시선은 오페라 이야기로 이어졌다. 피렌체와 런던 이후 정식 오페라 무대가 뜸했던 데 대해 그는 “20대에는 만족스러울 만큼 원숙하지도 못했고 맡을 수 있는 역할도 한정적이어서 흥미가 없었던 것 같다”고 짚었다. 해외 극장의 연락은 지금도 꾸준하지만 장기 체류를 요구하는 일정 탓에 수락이 쉽지 않다.
올해는 ‘사랑의 묘약’과 ‘카르멘’ 두 편에 참여했고, 국내 오페라 단체들로부터 피가로(‘피가로의 결혼’), 둘카마라(‘사랑의 묘약’), 에스카미요(‘카르멘’), 메피스토펠레스(‘파우스트’) 등 인기 오페라 출연 제안도 받았다. 그는 오페라 무대를 “늘 갈망하고 있다”면서 “기회가 된다면 참여해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성부(성악 음역대)와 무대, 모두에 열린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툴루즈 당시 지원서에 베이스바리톤 칸이 없어 베이스로 기록했지만 이후엔 주최 측에 따로 메일을 보내 성부를 직접 적어 넣었다고 했다. 다만 베이스라고 적으면 ‘깊고 어두운 음성’을, 바리톤이라면 ‘더 가볍거나 테너에 가까운 바리톤’을 원하는 심사위원들의 기준에 지쳐 아예 성부를 적지 않을 때도 있다.
그는 “주력하는 오페라 레퍼토리는 베이스도 되고 바리톤도 되는 두 파트의 중간 영역이자 양쪽 모두라 어느 쪽으로 불리든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했다. 스스로 한 성부에 가두지 않는 셈이다.
뮤지컬·트로트·오페라 넘나든 10년
“모든 시간 충실히, 후회 없이 보냈다”그는 오페라뿐 아니라 뮤지컬 무대나 트로트 프로그램에도 도전하며 “꿈을 이루고 실천하면서 부지런히 살았다”고 돌아봤다. 2022년 ‘엘리자벳’ 프란츠 요제프로 데뷔해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 신인상을 받았다. 이후 ‘오페라의 유령’ 라울 역이나 ‘모차르트!’, ‘마리 앙투아네트’ 등에 합격했지만 합류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상처를 받기도 했다.
뮤지컬은 “자신을 더 알려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 계기가 됐고, TV조선 ‘미스터트롯2’ 도전은 그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최근에는 창작 뮤지컬 ‘청주’에 주역으로 참여하면서 창작 작품 연구와 발성, 캐릭터 표현 등 다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면 해오지 않던 노력도 필요하고, 그간의 나를 뛰어넘는 선택도 해야 하죠. 지나고 보니 모든 시간을 충실하게, 후회 없이 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을 묻자 “사명감이 있다면 계속 건강하게 노래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계속 상처받고 치여도 정진하라”는 당부에는 그가 늘 외쳐 온 ‘포지티브 파이팅’이 담겼다. 10년 뒤, 20년 뒤의 모습에도 “건강하게 살아 있으면 좋겠다”고 답하더니 대신 미래의 자신에게 건넬 말을 골랐다. “너 자신을 더 달가워하고 더 칭찬하고 네가 남들을 대하듯 너에게도 다정하고 관대해라. 지금까지 잘해 왔다. 네가 걸어가는 길에 더 확신을 가져라. 옳은 길이다.”
▲ 10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2026 가을밤콘서트’ 포스터. 베이스바리톤 길병민과 소프라노 황수미, 바이올리니스트 윤소영, 지휘자 차웅이 이끄는 군포프라임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함께 무대를 꾸민다.
최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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