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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한 ‘서양 문명’ 신화는 거짓… 다 얽히고설켜 만들어진 거지

입력: ‘26-10-02 00:22 / 수정: ‘26-10-02 00:22

서양의 탄생/조세핀 퀸 지음/이지은·장시은·배소연 옮김/까치/686쪽/3만 9000원

역사, 수많은 이동 ·교류의 선택
문명, 인위적으로 분절한 개념
서양, 구분 짓기 위해 만든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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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1년 스코틀랜드 루이스섬에서 발견된 12세기 후반~13세기 초의 중세 체스 세트인 루이스 체스맨. 체스는 인도에서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들어왔지만, 이 체스 말들은 스칸디나비아 예술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오른손을 볼에 댄 채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재상의 말은 중세 유럽 이후 다른 체스 세트에서는 여왕의 말로 바뀌었다. 까치 제공


유럽 문명의 뿌리는 어디일까. 대부분 고대 그리스·로마라고 답할 것이다. 세계사 교과서는 그리스와 로마, 기독교의 번성과 르네상스, 두 번의 ‘세계 대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문명을 위주로 다룬다. 유럽 문명이 다른 문명보다 더 중요해 보이고,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고대사 교수인 저자는 유럽 문명이나 중국 문명처럼 특정한 ‘문명’을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문명적 사고’를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사고는 각각의 문명을 이웃 문명과 분리시키고, 문명이 스스로 생겨나고 번성하며 쇠퇴하는 독립적인 개념으로 여겨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책은 문명의 관점에서 봐왔던 유럽의 역사를 되짚는다. 18세기 유럽에서 탄생한 개념인 ‘문명’은 애초 ‘진보한 사회’라는 뜻이었다. 당시 유럽인들은 수렵에서 목축을 거쳐 농업, 상업, 산업으로 이어지는 척도로 각각의 사회 수준을 측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고방식은 필연적으로 문명 간 우열을 만든다. 또 근대 제국주의 확장의 근거로 사용됐다. 일본 제국주의가 그랬다. 조선은 미개하다며 개화를 시켜주겠다며 총칼을 들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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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사베이 제공


저자는 이렇게 만들어진 ‘서양’이라는 개념이 사실은 유럽과 다른 사회를 구분하기 위한 유용한 관념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원하는 사회만 ‘우리’로 포섭하고, 원하지 않는 사회는 ‘동양’으로 칸막이쳤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러나 서양은 고대 그리스·로마뿐 아니라 그전부터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선택, 이동과 교류로 형성된 것이라고 반박한다. 실제로 유럽 여러 국가는 비슷해 보이지만 저마다 다르게 발전했다. 기후 변화나 지역의 취향에 따라서 무엇을 받아들일지, 어떻게 바꿀지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이탈리아 중부에 존재했던 에트루리아의 도시 카이레의 기원전 7세기경 무덤에서 나온 포도주를 섞는 그릇에서 이런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릇 한쪽에는 해전 장면, 다른 쪽에는 ‘오디세이아’의 이야기 중 하나인 괴물 키클롭스와의 격투 장면이 그려졌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외눈박이 괴물은 호메로스 판본과 달리 거인이 아니다. 주인공 오디세우스 역시 당시 카이레에서 ‘우투세’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타카에 돌아와 아내 페넬로페의 부정을 알게 된 오디세우스가 그녀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코르토나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여생을 보낸다는, 우리가 아는 것과 꽤 다른 판본의 이야기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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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2000년대부터 현대까지 4000년의 유럽 역사를 통시적으로 살펴본다. 딱딱한 해설보다 이야기를 주제별로 묶었다. 기원전 1300년경 고대 이집트 파라오와 외국 왕들이 주고받은 수백편의 편지인 ‘아마르나 서신’, 놀라울 정도로 닮은 로마와 서아시아의 법전, 페니키아의 항해술, 인도 문학, 아랍 학문, 스텝 지대의 금속 공예 등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저자는 이를 통해 “서양의 뿌리는 단일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풍부한 고고학적 증거와 문헌 자료는 물론 고대 DNA(aDNA) 연구로 밝혀진 다양한 인종의 이동과 기후변화 등도 증거로 내민다. 기원전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태어난 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이밖에 유럽의 무슬림과 유대인, 이교도가 수세기에 걸쳐 편견과 박해의 대상이 된 역사도 짚는다. 저자는 이를 통해 “역사는 진보나 퇴보로 이해할 수 있는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역사란 다양한 사람들의 얽힘’이라는 저자의 말을 저절로 곱씹게 된다.

김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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