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벚꽃동산’의 연출 사이먼 스톤이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연극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마지막 희곡을 오늘의 서울로 옮긴 작품이다. LG아트센터가 제작해 2024년 6월 초연한 뒤 부산과 홍콩, 싱가포르, 호주 애들레이드를 거쳐 미국 뉴욕에 닿았다. 19세기 무기고로 지어진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26일까지 이어지는 북미 초연은 2년 3개월 국제 투어의 마지막 무대로, 전 회차(11회)가 매진됐다. 연출가 사이먼 스톤(42)에게는 2018년 ‘예르마’ 이후 8년 만의 아모리 복귀다.
뉴욕 개막 다음 날인 17일(현지시간)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아티스트 토크’에 참석한 스톤은 한국과의 인연을 설명하면서 “아내가 내가 몇 달 사라졌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 영화에 중독된 시기를 꺼냈다. 그는 2017~2018년 무렵 한국 영화를 하루 네댓 편씩 보며 지냈다면서 자신을 “한국 영화라는 사원 앞에 엎드린 이름 없는 신도”에 비유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브루스 윌리스, 빈 디젤, 드웨인 존슨 같은 할리우드 영웅은 건물에서 떨어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지만 한국 영화의 주인공은 정말로 아파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다시 뛰고 악당을 잡는다. 그 과정에서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느끼는 그런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산다”면서 “인물을 보는 시선이 정말 좋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꿈이 현실로 바뀐 것은 2020년 팬데믹 봉쇄 속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였다. 오랜 협업자 바우터르 판 란스베이크가 오페라와 영화를 하면서도 여전히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다고 스톤은 곧바로 “한국 배우들과 작업해야 한다”고 답했다.
▲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파크 에비뉴 아모리 웨이드 톰슨 드릴 홀에서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 희곡을 사이먼 스톤 연출이 한국 현대로 옮겨 과거와 현재, 희망과 절망, 전통과 혁신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재벌가의 현실을 그렸다. 무대 위에 선 2층 높이의 유리집으로 시선을 끈 ‘벚꽃동산’은 이번엔 공간의 역사까지 겹쳐 전체 그림이 달라졌다.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몇 달 만에 LG아트센터와 이메일이 오가며 작품 구상을 했고, 당시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과 파크 애비뉴 아모리를 함께 이끌던 오페라·연극 연출가 피에르 오디(1957~2025)와도 연결되면서 이번 공연까지 이어졌다.
프로듀서이자 브루클린음악아카데미(BAM) 예술감독이었던 데이비드 빈더가 “왜 체호프였느냐”고 묻자 스톤은 “사람들은 한국을 일본과 비교하는 실수를 자주 하지만 기질을 보면 러시아와 훨씬 가깝다”면서 “술을 삶의 방식이자 대화와 사업의 수단으로 삼는 점, 야성적인 면이 그렇다”고 진단했다. 그는 “러시아인들이 역사 내내 미래와 정체성을 두고 불안해했듯 한국인들도 ‘우리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면서 결정적 이유는 ‘혁명과의 거리’였다고 했다.
체호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일어났다. 스톤은 “한국은 1987년까지 군사정권이었고, 답을 얻을 때까지 거리로 나선다”면서 서구에서 체호프 희곡 속 인물이 “혁명이 필요하다”고 외치면 관객은 심드렁하지만, “역사 내내 자신들의 미래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민족인지 묻는” 한국인에게는 혁명은 살아 있는 말이라고 해석했다.
‘벚꽃동산’을 만들 때 LG아트센터로부터 배우들을 제안받았고 “배우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형편없는 글마저도 빛나게 만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캐스팅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사람을 고른 뒤 그 사람에게 무엇을 시킬 수 있을지 생각한다”면서 “다시 쓰기로 택한 고전, 배우에 대한 매혹, 지금 세상이 이야기해야 할 것, 이 세 꼭짓점 사이에 놓이는 것을 찾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모든 아이디어의 시험대”라고 설명했다.
아침에 쓴 장면을 번역가에게 넘겨 그날 오후 배우들과 읽는 식이라 리허설은 집필과 동시에 굴러갔다. 한국 사람이 아닌 그의 제안은 모두 배우들의 검증을 거쳤다. 스톤은 “그런 일은 안 일어난다는 말이 돌아오면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고 되묻고, 누군가 친구가 이런 일을 겪었다고 말할 때까지 계속 긁어댔다”고 떠올렸다.
스톤이 꼽은 한국 배우들의 미덕은 우스꽝스러워질 위험을 감수하는 과감함과 ‘감정적 절대성’이다. 그는 “젠더 역할이 어떨 땐 정말 보수적으로 그려지다가도 어떤 경우엔 상상도 못 할 방식으로 완전히 뒤집힌다”며 “정말 매력적”이라고 했다. “정직한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이 웃음으로 시작해서 비극의 계곡으로 떨어졌다가 다시 웃음으로 돌아온다”며 “모든 예술은 사랑하게 만들고 울게 만들어야 하며, 둘 다 못 하면 실패”라고 단언했다.
▲ 연극 ‘벚꽃동산’은 안톤 체호프 희곡을 사이먼 스톤 연출이 한국 현대로 옮겨 과거와 현재, 희망과 절망, 전통과 혁신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재벌가의 현실을 그렸다. 현대적인 유리집 옆면에 놓은 계단은 상승과 몰락이 상징이다. 추락하는 재벌 3세 송재영(왼쪽부터·손상규 분)과 송도영(전도연), 자수성가해 기업을 인수하는 황두식(박해수)의 구도에서 시대 변화가 읽힌다.
©Stephanie Berger·파크 애비뉴 아모리 제공
1904년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 가문을 오늘의 한국 재벌가로 옮긴 ‘벚꽃동산’에선 전도연이 가족 기업이 기우는 줄도 모르는 3세 송도영을, 박해수가 자수성가한 사업가 황두식을 각각 연기한다. 손상규는 골프 스윙과 LP턴테이블에 빠진 송재영, 최희서는 회사 부사장으로 일하며 홀로 위기를 걱정하는 강현숙, 유병훈은 시대의 몰락을 상징하는 송도영의 사촌 김영호 등을 열연하며 몰입감을 더한다.
무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중독’을 고백했다. 밤마다 인스타그램 건축 피드를 넘기던 그는 서울의 건축가 사울 킴의 연작 ‘아키텍처 아노말리’에 매료됐다. 스톤은 “무에서 솟아나는 것을 받아들여 논리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이 연극”이라면서 “공연이 처음인 그에게 원래 하던 대로만 하라고 했고, 허공으로 사라지는 계단과 솟아오르는 집 두 작품을 합쳐달라고 청했다”고 소개했다.
대화 말미에는 오는 11월 20일 북미에서 개봉하는 스톤의 신작 영화 ‘엘시노어’ 이야기도 나왔다. ‘불의 전차’의 배우 이안 찰슨(1949~1990)이 에이즈로 죽어가면서도 영국 국립극장 ‘햄릿’ 무대에 오른 실화를 그렸다. 다음 달 7일 런던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된다.
스톤은 이 영화를 바깥세상으로부터 서로를 지켜주는 연극인 공동체에 바치는 증언이라고 했다. 이어 아티스트 토크가 끝난 뒤 ‘파이팅’을 외치며 공연을 할 배우들을 떠올리며 체호프의 ‘세 자매’ 한 구절을 언급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함께 들면 세 배, 어쩌면 네 배까지도 더 들 수 있습니다. 그게 우리가 연극을 만드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오늘 밤 이 공연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이유도 바로 그 팀에 있습니다.”
뉴욕 최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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