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과 사후세계에 대한 도서전/차한비 지음/타이피스트/302쪽/1만 5000원
이북 리더와 이북 리더기의 만남
유희의 논리로 묶은 유쾌한 시어
‘시 없는 제로시’의 고통 없는 쾌락
“서정시 쓸 수 있을까” 고민하기도
▲ 차한비 시인
시(詩)는 시인이 뱉어낸 토사물이다. 시인의 안에서 얽혀있던 언어의 뭉치가 정제되지 않은 채 세상에 던져진다. 기상천외한 단어의 조합을 묶어내는 것은 이성이 아닌, 유희의 논리다. 처음엔 재밌지만 점점 심각해진다. 유쾌한 말놀이 이면에 우리 욕망의 맨얼굴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시인 차한비(26)의 첫 시집 ‘산책과 사후세계에 대한 도서전’을 다 읽은 뒤 머릿속이 뒤죽박죽 어지럽다. 그의 문장과 마주한 독자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차한비가 직조한 언어는 의식보다는 무의식에 더 가까이 있다. 시인의 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동시대를 지탱하는 욕망의 지층으로서 ‘밈’(meme)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영상전문매체 주식회사 인피니티가 신제품을 출시했다/ 제로시/ 도로시 아니고/ 제로콜라 제로소주 제로국밥을 이을 제로라인 신제품// 제로시/ 제로투 아니고/ 구독의 형태로 구매 가능/ 시에 시 없음/ 넣을 수 없는 주머니”(‘제로시 프로젝트’ 부분)
바야흐로 ‘제로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콜라는 칼로리가 없는 제로콜라를 마신다. 술도 알코올이 없거나 극소량만 들어있는 무알콜, 논알콜을 찾는다. 간식도 당류를 제거한 제로과자가 인기다. ‘더 많은 것’을 추구했던 인간이 이제 ‘더 없는 것’을 욕망한다. 너도나도 ‘없음’을 뽐낸다. 시라고 다를 것 있나.
시인은 ‘제로시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시는 시인데, 그 안에 시가 없는 것. 무슨 말장난일까, 싶으면서도 이것이 오늘날 우리 세상의 실상임을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쾌락은 취하되, 고통은 제거하겠다는 포부. 당장은 인간이 승리한 것 같지만, 글쎄. 영원한 것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언제나 아이스 브레이킹은 어려운 법/ 저희 서로 인생의 좌우명? 같은 게 있으면 말해 보는 시간을 가질까요/ 제 좌우명은 아무래도 사랑과 평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북의 리더가 말했다/ 아 러브 앤 피스 좋죠... 저는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입니다/ 이북 리더기를 한쪽에 내려놓은 내가 말했다/ 혹시 평냉 좋아하세요?/ 내가 말했다/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던데요/ 이북 리더기를 바라보는 이북의 리더가 말했다/ 평냉은 모르지만 평생에 대해선 잘 알아요/ 뭐지 이 사람 나랑 결혼을 전제로 만나려는 건가”(‘이북과 e-book의 독서론적 만남’ 부분)
대뜸 ‘이북의 리더’와 소개팅한 ‘썰’을 푸는 이 사람, 심히 당황스럽다. 이북의 리더(아마 김정은?)와 화자가 마주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손에 ‘이북 리더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북의 리더’와 ‘이북 리더기’ 사이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북의 리더 좌우명이 “사랑과 평화”라는 점도 어처구니없다. 그러나 시에서는 그래도 된다. 무엇을 상상해도 된다. 오히려 거리가 멀수록, 차이가 클수록 더 재밌고 더 아름답다. 소개팅이 끝나갈 때쯤, 이북의 리더가 화자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인다. “귀여워 ㅋㅋ 통일할래요?”(‘이북과 e-book의 독서론적 만남’)
차한비는 언어의 배를 갈라 열어보는 시인이다. “암살자는 이상해 죽이는 게 일인데 이름에 살자 같은 희망적인 말이 들어가다니”(‘암살자는 이상해’), “어디야/ 이디야/ 그래서 어디야/ 이디야/ 아 어디야가 아니라 … 그래서 어디야”(‘서광장례식장’)와 같은 문장들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중문화도 그에게 중요한 레퍼런스다. 힙합, 일본 만화 ‘원피스’, MBC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 등 시인의 무의식에 켜켜이 쌓여있던 인터넷 밈들이 시 쓰기를 계기로 기괴한 형태로 뭉쳐 쏟아져 나온다.
시집 끝부분에 실린 시 ‘나도 언젠간 서정시를 쓸 수 있을까’는 시인의 실제 고민인 것 같다. 서정시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굴더니, 그래도 조금 걱정은 되나 보다. 그러나 진지하게 시작하는 듯하더니, 버릇을 못 고치고 금세 원래대로 돌아온다.
“나도 그럴 수 있을까/ 내게 그런 서정이 남아 있긴 할까/ 뒤집힌 서정은 희미한 정서가 되어 남아 있는데/ 그걸 알아봐 줄 사람이 있을까/ 서정시는 어떻게 쓸까/ 가령 서정주는 무슨 이름부터 서정이라/ 그 정도 이름이 되어야 서정으로부터 선택받는 걸까”
오경진 기자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