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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현실이라도… 이야기 주인공은 ‘나’

입력: ‘26-10-23 00:07 / 수정: ‘26-10-23 00:23

가호/무라카미 하루키 지음/홍은주 옮김/문학동네/376쪽/1만 8500원

꿈·환상이 뒤섞인 매력적인 소재
여성 단독 주인공 내세운 첫 장편
인물 내면 묘사·설득력은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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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시대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가호’는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이야기와 세계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하는 소설이다. 서울신문 DB


꿈과 환상으로 뒤틀린 현실에서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된다. 세계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만큼은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77)의 신작 ‘가호’는 독특한 소재와 줄거리를 앞세우면서도 쉽고 편안하게 읽힌다. 그가 왜 대중의 환호를 받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작가는 현실과 꿈이라는 이질적 요소를 거칠게 맞부딪친다. 잘 붙지 않는 틈새에는 ‘이야기’라는 접착제를 바른다. 다만 조금 헐거운 느낌은 피할 수 없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 같은 건 못합니다. 그런 훌륭한 능력은 갖추지 못했어요. 다만 미래와 현재 과거를 잘 구분할 수 없다는 것뿐이지요. 그것들은 제각각 서로 암시를 주고받으며 뒤섞여 우리 안에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55쪽)

‘가호’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가호는 그림책을 만들며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다. 그에게 난데없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개미핥기가 나타나서는 도시 외곽에 있는 무사시사카이로 이사를 권유한다.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긴 가호에게 개미핥기는 독특한 과제를 내준다. 브라질에서 공수한 흰개미 병조림을 구해달라거나, 정글을 공포로 뒤덮은 재규어에게 복수를 해달라거나. 도쿄에 사는 평범한 일본인 여성에게는 일어나기 힘든 비현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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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환상적 이미지를 능청스럽게 배치한다. 매력적이지만, 독자를 설득하기엔 힘이 딸린다. 이질적 상황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인물을 다루면서도, 정작 인물의 내면을 파고들기보다는 장기판의 말이 움직이듯 당위적인 선택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작가가 공들여 빚어낸 형상들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얕은 언어유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까 당신이 필연적으로 그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선도 악도 아닌 것도 다 같이 당신 품으로 밀려듭니다. 보세요, 이렇게 개미핥기도 오지요, 재규어도 나타나지요, 흰개미 여왕도 찾아옵니다. 당신이 그것들을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밀려드는 그것들 가운데서 어떤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단호히 제거해야만 합니다.”(170쪽)

하루키는 소설을 통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누구인지’ 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든 꿈이든, 세계는 분명히 이야기다. 내 앞에 있는 세계는 분명히 ‘내가’ 구성하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무엇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일본의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개미핥기, 재규어, 흰개미 여왕 같은 “문명”(117쪽) 너머의 존재들이 나름의 현실성을 지니는 근거는 바로 내가 그것들을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꿈이라는 환상의 굴레를 깨뜨리는 주체 역시 ‘나’일 수밖에 없다. 흰개미 여왕에게 몸을 빼앗긴 어머니의 심장에 가호가 칼을 꽂는 장면은, 주체성을 되찾으려는 단호한 결단을 은유한다.

‘가호’는 하루키가 여성을 단독 주인공으로 그린 최초의 장편소설로 화제가 됐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는 미지수다. 소설 내내 가호의 여성성은 딱히 도드라지지 않는다.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긴 투병을 마친 뒤 도전하는 마음으로 써낸 작품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전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이후 3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으로 지난 7월 일본 현지 발매 후 나흘 만에 발행 부수 30만부를 넘겼다고 한다.

문학동네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지난달 예약판매 직후 주요 온라인 서점 실시간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예약판매 엿새 만에 중쇄에 돌입했다고 한다. 강조하고 싶은 건지, 소설 안에서 작가가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는 문장이 있다.

“한 가지 마음에 새겨뒀으면 하는 게 있어. 그게 뭐냐면, 우리가 인생에서 겪는 심각한 혼란은 대부분 원인과 결과 사이의 등가성을 찾아내지 못해서 생긴다는 거야.”(322쪽 등)

오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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