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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같은 얼굴은 없었다

입력: ‘26-10-23 00:15 / 수정: ‘26-10-23 00:15

데뷔 65년 현재진행형 배우 김혜자

‘여전히 찬란하게’로 9년 만에 스크린 복귀… 아픈 역사 속 비극적 우정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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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김혜자


배우 김혜자(85)는 수많은 삶을 살았다. 가족을 돌보다 뿔이 나 자신만의 시간을 요구한 어머니였고, 아들을 지키려다 끝내 선을 넘어버리기도 했다. 혼자 살아가려 애쓰는 노인이었고, 다시 만난 사랑 앞에서 설레는 연인이었다. ‘엄마가 뿔났다’와 ‘마더’, ‘디어 마이 프렌즈’와 ‘천국보다 아름다운’. 같은 ‘어머니’, 같은 ‘노인’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빚어낸 인물들은 한 번도 같은 얼굴을 한 적이 없었다.

●들꽃처럼 있겠다던 그를 흔든 편지

1961년 데뷔 이래 65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평범한 이들의 욕망과 불안을 연기해온 김혜자가 지난 21일 개봉한 영화 ‘여전히 찬란하게’로 오랜만에 관객들 앞에 섰다. ‘길’(2017) 이후 9년 만의 극영화다. 이번에 그가 입은 이름은 순옥. 젊은 날의 단짝 정임(차미경)을 60여년 만에 다시 마주한다.

1942년 깊은 산골 마을. 열일곱 살 정임(최주은)과 순옥(박서경)은 지게에 나무를, 소쿠리에 나물을 지고 나르며 서로의 꿈을 속삭인다. 노래 잘하는 정임은 가수가 되고 순옥은 그를 무대에 세우는 단장이 되겠다 약속한다. 서울에서의 내일을 그리는 일만큼 즐거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공장 취직을 미끼로 어린 여자아이들을 데려간다는 흉흉한 소문이 번지고, 두 소녀는 몸을 숨긴다.

영화는 소녀 시절의 우정과 할머니가 돼 다시 만난 두 사람의 현재를 교차하며 순옥의 기억을 따라간다. 서로를 그토록 아끼던 둘은 왜 그 긴 세월을 함께하지 못했을까. 이혜숙 작가의 희곡·낭독극 형식의 짧은 대본에서 출발한 작품답게, 영화는 간결한 소품과 뚜렷한 인물들이 펼치는 작은 연극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두 소녀가 상경의 꿈을 노래하는 장면은 뮤지컬처럼 연출했다. 송일곤 감독은 “음악을 통해 이야기가 관객들에게 더 감성적으로 다가가길 바랐다”고 했다.

김혜자는 지난 15일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심한 감기로 시사회와 기자간담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이 작품을 택한 이유를 담은 손편지를 보내왔다.

출연까지는 먼 길이었다. 송 감독의 제안에 김혜자는 “집 앞에 있는 들꽃처럼 가만히 있고 싶다”며 쉬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송 감독은 몇 번이고 그를 찾아가 밥을 함께 먹고 편지를 띄웠다. 지난해 가을 송 감독이 보낸 편지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순옥은 울지 않습니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한 시간이 여전히 찬란하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믿는 사람입니다.” 김혜자는 시사회에 보낸 편지에 “그 말이 참 오래 마음에 남았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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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우 김혜자


●“아름답게 살고팠던 소녀들 기억하길”

“우리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기억해야 해요. 하지만 저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고 싶어 했는지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스크린 속 두 소녀를 “그저 아픈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바라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출연을 결심한 뒤 김혜자는 문을 닫고 영화 준비에 매진했다. 송 감독은 “명분이 생긴 후에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연습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대사 하나, 쉼표 하나, 시선 하나. 김혜자는 그것들을 되풀이해 고치며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작은) 대사 한 줄을 위해 그토록 연습한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고 송 감독은 돌아봤다. 촬영장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이미 순옥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한 대배우는 후배들에게 너그러웠다. 최주은은 대선배와 일대일로 마주하는 장면 촬영에 잔뜩 얼어 있었다. 그때 김혜자가 건넨 말은 “너 하고 싶은 것 다 했으면 좋겠다”였다. 노년의 정임으로 호흡을 맞춘 차미경은 김혜자의 연기를 “하얀색 도화지 위 물감을 떨어뜨리면 너무 아름답게 번지는 수채화 같았다”며 “촬영할 때 그저 상황에 같이 스며들고 번지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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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찬란하게’는 정임과 순옥의 과거 소녀 시절과 60년이 지나 할머니가 돼 다시 만난 두 사람의 현재를 교차해 보여 준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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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찬란하게’는 정임과 순옥의 과거 소녀 시절과 60년이 지나 할머니가 돼 다시 만난 두 사람의 현재를 교차해 보여 준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대사 한 줄·쉼표 하나까지 거듭 연습

범접하기 어려운 65년의 필모그래피는 늘 이렇게 차곡차곡 쌓여왔다. KBS 공채 1기 탤런트로 출발한 그는 1980년부터 22년간 방송한 ‘전원일기’에서 김 회장(최불암)의 아내를 연기하며 ‘국민 어머니’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매번 다른 어머니로 변주했다. 2008년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가족에게 1년의 휴가를 선언하고 집을 나선 어머니였고, 이듬해 봉준호 감독 ‘마더’에서는 아들을 구하려 직접 범인을 쫓는 어머니였다. 백상예술대상 대상만 네 차례 받았고, ‘마더’로 LA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안았다.

‘디어 마이 프렌즈’(2016) 희자는 혼자 살아가려 애쓰다 치매라는 현실과 마주하고, ‘눈이 부시게’(2019)의 혜자는 알츠하이머로 기억 속 젊은 날을 헤맸다. ‘우리들의 블루스’(2022)의 옥동은 아들과 어긋난 세월을 뒤늦게 마주했고, ‘천국보다 아름다운’(2025)에서의 해숙은 여든의 모습으로 천국에서 남편과 다시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순옥이다. 송 감독은 “눈앞에 있는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과 표정, 미묘한 미소를 포착하고 싶었다”고 했다. 김혜자가 편지에 옮겨 적은 송 감독의 바람도 다르지 않았다. “제가 바라는 것은 한 장면의 연기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가 시간 위에 남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을 위해 김혜자는 또다시 대본을 펼치고 대사와 쉼표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김혜자의 도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김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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