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단장 과감한 모험, 실력으로 확인
수석 박슬기-신예 이하연·김윤 호평
박자감 좋은 앙상블, 일사불란 군무
▲ 지난 18일 올린 국립발레단 ‘지젤’ 2막에서 처연한 연기를 보여준 엄나윤(지젤)·나대한(알브레히트). 국립발레단 제공
2막이 시작되자 객석의 공기가 달라졌다. 하얀 로맨틱 튀튀 차림으로 바닥 아래에서 떠오른 윌리 여왕 미르타가 부레(발끝으로 잘게 이동하는 동작)로 미끄러지듯 무대를 가로지르고, 양옆에서 윌리들이 여러 줄로 들어서자 무대에는 어느새 서늘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두 윌리의 짧은 솔로에 이어 윌리들이 박자에 맞춰 아라베스크(한쪽 다리를 뒤로 곧게 뻗어 올린 동작) 자세로 작게 뛰면서 엇갈려 갈 때는 객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팔과 다리를 올린 각도, 고개를 숙인 정도까지 거의 비슷하게 위치시킨 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윌리 군무는 작품의 상징적인 장면을 훌륭하게 구현했다.
무덤에서 깨어난 지젤이 모습을 드러내고 미르타 앞에서 춤을 출 때마다 관객들은 숨을 멈췄다가 내뱉기를 반복했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라는 닳은 표현이 ‘지젤’에서만큼은 과장이 아니었다.
지난 13~18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열린 국립발레단 ‘지젤’은 김주원(49) 단장이 취임 뒤 처음 서울 무대에 올린 전막 공연이다. 그가 앞으로 그려 갈 국립발레단의 얼굴을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지젤’은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티에(1811~1872)의 구상에서 출발해 1841년 파리오페라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랐다. 사랑에 배신당한 충격으로 숨진 시골 처녀 지젤이 밤마다 남자들을 죽을 때까지 춤추게 하는 처녀 귀신 윌리가 되고도 연인을 끝내 지켜 내는 이야기로, 낭만발레의 대명사로 꼽힌다.
▲ 국립발레단 ‘지젤’ 2막에서 지젤(박슬기)과 알브레히트(박종석)가 춤추는 장면을 노출 효과로 신비롭게 표현했다. 국립발레단 제공
국립발레단의 ‘지젤’은 파리오페라발레에서 반세기 넘게 무용수이자 발레마스터로 활동한 파트리스 바르(1945~2025) 버전을 쓰고 있다. 바르는 2011년 국립발레단을 위해 버전을 새로 짰다.
당시 초연 무대의 지젤은 수석무용수였던 김 단장이었고, 바르는 그에게 춤을 손수 전했다. 스승을 떠나보낸 이듬해 단장으로서 처음 올리는 ‘지젤’에 김 단장이 ‘초심’을 내건 까닭이다. 그는 프로그램북에 “오늘의 ‘지젤’을 바라보며 국립발레단과 깊은 인연을 맺은 바르 선생님을 떠올린다”면서 “그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가르침은 이 무대 안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적었다.
공연은 13일 수석무용수인 박슬기·박종석이 지젤과 알브레히트로 처음 짝을 이룬 개막 무대를 시작으로 18일까지 일곱 차례 이어졌다. 김 단장은 일곱 무대에 여섯 쌍의 주역을 세우고, 그 상당수를 드미 솔리스트와 코르드발레 등급으로 처음 전막 주역을 맡는 신예로 채웠다. 단장의 안목과 단체의 저력을 함께 시험하는 구성이다.
시험의 결과는 호평으로 돌아왔다. 박슬기는 ‘연기 장인’다운 안정감으로 개막 무대를 이끌었고, 17일 낮 공연에선 신예 김윤(코르드발레)을 리드하며 그의 성공적인 전막 데뷔를 든든히 뒷받침했다.
▲ 국립발레단 ‘지젤’ 1막에서 지젤(이하연)과 알브레히트(김기완)가 추는 사랑의 춤. 국립발레단 제공
14일과 17일 저녁 무대에 오른 이하연(코르드발레)은 처연하게 광기에 잠겨 드는 1막의 지젤에 이어, 2막에선 신비로운 부레로 윌리가 된 지젤을 그려 내 감탄을 자아냈다.
16일 공연에서 김 단장의 초심이 앙상블에서도 읽혔다. 1막 마을 사람들은 박자를 정확히 타며 움직였고, 주역 뒤에 비켜서 있을 때조차 몸짓이 꺼지지 않았다.
안수연(코르드발레)은 1막 지젤을 섬세하게 연기하며 지젤의 죽음에 대한 설득력을 높였다. 알브레히트를 맡은 허서명(수석)은 2막에서 윌리들에게 쉼 없이 춤을 강요당하는 대목에 이르자 앙트르샤 시스(공중에서 두 발을 빠르게 교차하는 점프)를 30여회 뛰어오르며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보여 줬고, 객석은 박수로 그의 열정에 화답했다.
2막 초반에 두 윌리 중 한 명으로 나선 엄나윤(코르드발레)이 중반엔 지젤을 연기했다. 동작 하나하나 우아하면서도 부드럽게 소화한 그는 발목을 단단히 고정한 채 발끝만 잘게 교차하는 부레로 객석에서 탄성을 이끌어 냈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김 단장은 마이크를 잡아 지젤 안수연이 컨디션 난조로 2막 도중 무대에서 내려왔고, 남은 2막을 엄나윤이 이어받았다고 설명하며 양해를 구했다. 관객들은 안수연만의 지젤을 끝까지 보지 못한 데 걱정과 아쉬움을 내비치면서도 ‘준비된 지젤’의 활약으로 공연이 흐트러짐 없이 막을 내린 데 만족감을 드러냈다.
▲ 국립발레단 ‘지젤’ 2막에서 이은서(지젤)가 아름답고 힘있는 점프를 보여주고 있다. 국립발레단 제공
16일 2막 도중 긴급 투입된 엄나윤
18일 공연서 나대한과 ‘지젤’ 전막
발랄한 1막, 처연한 2막으로 ‘숨멎’18일 폐막 무대는 앞선 회차의 역량이 한층 끌어올려진, 완벽에 가까운 공연이었다. 1막 마임은 더 우아해졌고, 지젤 어머니 베르트와 알브레히트의 약혼녀 바틸드의 마임까지 한결 기품을 더해 보는 맛을 살렸다.
열여섯 살 시골 처녀를 떠올리며 춤췄다던 엄나윤의 지젤은 더욱 발랄하고 상큼했다. 1막 솔로에선 흔들림 없는 균형감과 안정감으로 단단한 기본기를 과시했다.
철없지만 솔직한 남자를 그리겠다던 나대한(코르드발레)은 손끝까지 연기하듯 섬세하게 알브레히트를 빚어갔다. 2막 바리에이션의 피루엣에선 머리에서 튕겨 나온 땀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관까지 연출했다. 높은 기량을 보여 줬던 터라 앙트르샤 시스를 기대했지만 이날 그는 다른 판본의 동작으로 소화했다.
윌리 군무는 이번 공연의 가장 큰 수확이다. 팔을 뻗는 각도와 고개를 숙이는 깊이가 한 사람처럼 맞아떨어진 대열은 엇갈리는 순간에도 흐트러짐이 없어 얼마나 훈련을 거듭해 이 장면을 쌓아 올렸는지 짐작하게 했다.
필립 엘리스가 이끈 오케스트라도 아돌프 아당(1803~1856)의 음악을 탄탄하게 받치면서 매회 공연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박자를 아는 앙상블, 한 몸처럼 움직이는 윌리 군무, 회차마다 이어진 주역들을 향한 호평, 그리고 무대 위 변수 앞에서 주역의 빈자리를 메운 무용수가 이틀 뒤 폐막 무대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기까지. 김주원의 첫 ‘지젤’은 바르의 유산을 지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단장으로서 자신의 미감과 안목을 제대로 증명한 무대였다. 숨죽여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번 ‘지젤’이 보여 줬다.
▲ 지난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한 ‘지젤’의 2막 윌리 군무 장면. 국립발레단 제공
최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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