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출판사’ 첫 책 ‘은총수업’
산문집 펴낸 남상근 신부
살며 겪어야 할 일은 겪을 수밖에
환란 지나야 비로소 깨달음이 와
은총, ‘참 좋은 것’에 수긍하는 힘출판사 대표 변신 김금희
편집자로 창작 못잖은 희열 느껴
남 신부 만난 덕에 깊은 신앙 얻어
앞으로도 가톨릭 필자 발굴할 것
▲ 남상근(왼쪽) 라파엘 신부와 소설가 김금희가 지난 24일 서울 공덕동성당 본당에서 책 ‘은총수업’을 들고 있다. ‘은총수업’은 남 신부의 첫 산문집이자 김금희가 운영하는 출판사 페퍼로니의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
이지훈 기자
“살면서 책과 같은 삶의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시겠지만, 늘 신자가 강자고 사제가 약자니까요. 신부들이 큰소리치는 것 같지만 정반대죠. 하하!”
‘소설가 김금희’가 영성으로 충만한 책 ‘은총수업’(페퍼로니)으로 찾아왔다. 직접 쓴 건 아니다. 출판사 사장이자 책의 충실한 편집자로 만듦새를 책임졌다. 그가 한발 물러나며 앞세운 주인공은 남상근 라파엘 신부다. 두 사람을 지난 2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성당에서 만났다. 남 신부는 스스로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밝혔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시종일관 유쾌한 에너지로 기자를 웃기고 울렸다. 김금희가 잠깐 펜을 내려놓고 편집자로 변신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보다 앞서 왜 지금 우리에게 ‘은총’이 필요한 것일까.
“사람의 능력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요. ‘나’ 혹은 ‘우리’를 세상의 중심에 둘 때 여러 문제가 생기죠. 꼭 그런 게 아님을, 우리를 뛰어넘는 어떤 게 작동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바로 은총을 받아들이는 시작이죠.”
‘은총수업’은 올해로 사제 서품 25주년을 뜻하는 ‘은경축’을 맞이한 남 신부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그동안 미사와 강론을 통해 신자들에게 전했던 이야기들을 단정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성경 속 구절이 일상의 고민과 어우러지는 가운데 오늘날 우리의 삶이 결코 우리만의 힘으로 완성되는 게 아님을 넌지시 가르쳐 준다. 꼭 천주교 신자가 아니어도, 신앙심이 없어도 펼쳐볼 만하다. 신앙보다는 삶과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라서다.
김금희는 책 57쪽에 있는 ‘모든 불이 지나간 뒤’라는 제목의 글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고 했다. 해당 글에서 남 신부는 열왕기 상권 19장 12절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살면서 겪어야 할 것은 겪어야 합니다. 피할 도리가 없죠. 예언자 엘리야의 이야기인데요. 엄청난 혼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들을 여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만약 그러면 우리가 이미 성인(聖人)이죠. 모든 환란이 다 지난 뒤에 비로소 무엇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진리일 수도 삶의 신비일 수도 있죠. 그런데 잘 생각해 보죠. 지진과 불과 바람이라는 혼란이 없었다면 진리나 신비가 우리 눈에 보일까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걸 지나와야 비로소 더 귀한 걸 발견하게 되죠.”
‘너무 한낮의 연애’, ‘경애의 마음’, ‘대온실 수리 보고서’ 등의 소설을 펴내며 동시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김금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그러나 2023년에 세례를 받았으니, 생각보다 신자로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다. 짧은 세월에도 깊은 신앙심을 키울 수 있던 건 공덕동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남 신부와의 만남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기 이름을 내건 출판사 첫 책의 저자로 남 신부를 당당히 앞세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페퍼로니라는 출판사 이름은 그의 소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서 따온 것이다. 남 신부의 책을 만들면서 김금희는 “창작 못지않은 희열감을 느꼈다”며 “앞으로도 가톨릭 관련 좋은 필자를 발굴해서 멋진 책을 펴내고 싶다”고 말했다.
한때 기자를 꿈꾸기도 했다는 남 신부는 서울대 신문학과에서 공부했다. 대학원 공부를 이어가던 중 서울 성북구에 있는 성가복지병원에서 우연히 자원봉사를 하게 됐는데 그 길로 신학을 공부하고 2001년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는 분명 교회 안에서 ‘대접받는’ 사람이다. 그 사실 때문에 의기양양하고 더러는 자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은총은 자만심에 빠진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은총은 자기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 잘 느끼는 것 같아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 ‘좋으신 분’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그렇게 되면 아무리 열악하고 불행한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어요. 은총은 ‘참 좋은 것’을 ‘참 좋은 것’으로 수긍하게 하는 힘이에요.”
오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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